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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회고

31 Dec 2018 | 7 minutes read

Tags: 런던 , 개발자 , 회고

달력을 보며 올해 시간 너무 빠르다, 라고 얘기하는 것이 진부해 질 쯤 되니 벌써 2018년의 끝자락이다. 유난히 많은 변화를 겪은 한 해이니만큼 치열하게 사느라 자칫 흘러가 버릴 수 있는 것들을 정리해 두고자 한다.

가장 큰 변화: 20년 넘게 살던 뉴질랜드를 떠나 런던에 오다.

런던에서 맞은 첫 아침 하늘 “런던에 왜 왔어요?” 라는 질문은 사실 항상 짧게 대답하기가 곤란하다. 매번 장황하게 답변하기도 좀 그러니까 (사실 그 정도로 절박하게 궁금한 사람도 드물테고) 표면적으론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로서의 역량과 커리어 개발을 위해서” 정도로 간단하게 답변하지만 내면적으론 그것만으로 축약하기 어려운 나름의 사유의 시간이 있었다.

20년간 해온 뉴질랜드에서의 생활은 모든 면에서 너무나 편하고 익숙해서 언제부터인지 별 다른 노력을 필요로 하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노력을 요구하지 않는 환경에서 개인적으로 더 성장하기에는 한계가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그런 익숙함을 뒤흔들어 줄 환경이 필요했고, 지지기반 없이 오롯이 내 개인으로서의 역량을 전부 소진해야만 그 판 위에서 간신히 균형을 잡고 서 있는 게 고작인, 그런 시간을 원했다. 그리고 그 역치에 수렴하는 과정속에서 아직 마주하지 못한 가능성을 찾기를 바랐던 것 같다.

어디를 갈까 몇달을 고민하다 결국 여러 준비과정을 거쳐 영국 워홀 비자를 받고, 잘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살던 집을 비우기 시작했다. 내가 사직서를 내던 날, 입사 당시 나를 채용한 매니저가 해준 말이 기억에 남는다. 싸워서라도 자리를 만들어 줄테니 원하면 언제든지 돌아오라고 - 눈물이 핑 돌았다. 끝까지도 Air New Zealand는 정말 직원들 잘 챙기고 일하기 좋은 회사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튼 그렇게 무엇 하나 약속되지 않은 채로 런던행 비행기에 올랐다. 에어뉴질 사원 혜택으로 신나게 전세계를 쏘다니는 것에 익숙해진 나는 간만에 평소 가격대로 항공편을 구매하느라 지갑이 영혼까지 털리는 느낌이었다.

가능하면 경력에 긴 단절을 남기고 싶지 않아서 도착하자마자 바로 취업 활동을 시작했는데 5일째 되는 날에 첫 잡 오퍼를 받는 등 생각보다 너무 잘 풀려서 놀랐다. 평소에 꾸준히 공부하던 게 헛되지 않았구나 싶고 말도 안되게 쏟아져 들어오는 인터뷰 요청 숫자에 내심 뿌듯하기도 했던 반면, 이 중에 정말 잘 골라야 한다 라는 압박감도 어느정도 있었다. 런던의 테크 커뮤니티는 너무나 활발하고, 또 실력좋고 똑똑한 엔지니어들이 많아서 이런 환경에 있는 것만으로 큰 자극이 되고 배우게 되는 점이 많다. 덕분에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로서의 여정은 여전히 너무나 즐겁다.

직업적 경력개발 이외의 측면에서 얘기를 하자면 매일 뉴질랜드와 다른 풍경을 보는 것도 재미있고 여러가지 전시회, 공연, 축구경기 등 반복적이게 되기 쉬운 일상에 깊이를 더해주는 문화가 많은 점이 너무 좋다. 살아보니 참 괜찮은 도시. 맑은 날의 런던아이

깊게 파서 가장 도움이 된 기술 지식: 클라우드 인프라와 Kubernetes

본격적으로 배우고 싶었던 프런트엔드 개발 관련 업무를 첫날부터 경험시켜 준다는 제안에 혹해서 입사했던 런던의 현재 직장에서 정작 실제로 가장 주요하게 맡게 된 업무는 클라우드에서의 인프라와 컨테이너 오케스트레이션 플랫폼 재구축 작업이었다. 여기서 자세한 이야기를 하기엔 힘들지만 AWS + Fleet에서 돌아가는 서비스들을 Kubernetes로 이전하는 작업이었는데 예전 직장인 Air New Zealand에서도 플랫폼 팀이 세운 AWS 인프라에 컨테이너 형태로 어플리케이션을 배포하는 건 마찬가지였지만 이 인프라를 처음부터 끝까지 내 손으로 직접 구축/운영하며 다운타임 없이 서비스를 하나하나 이전하는 것은 또 다른 이야기라서 네트워킹, 스토리지, 그리고 AWS와 Kubernetes라는 기술의 전반적인 지식 등 꽤나 다양한 주제에 관한 깊은 이해도를 요구했다. 심지어 당시 유럽 쪽에 EKS를 지원하는 AWS region이 없어서 직접 클러스터를 면밀하게 튜닝해야 했다.

작업에 착수하다 보니 기존의 설계에 이런 저런 문제점들이 많이 보여서 그 위에 계속 확장을 해나가기 보다는 새 인프라를 구축해서 VPC Peering으로 기존의 인프라에 연결한 뒤에 이전이 끝나면 기존의 인프라만 철거하는 노선으로 결정했고, 이런 과정에서 모듈들이 많아지다보니 높은 확장성과 일관성을 중요시 해야겠다는 판단에 Terraform을 도입하여 선언적으로 인프라를 코딩화하기 시작했다. 또한 기존의 클러스터에서 로그나 메트릭 등 데이터가 불충분해서 팀원들이 문제 발생시 정확히 어디부터 손을 써야 할지 잘 모르는 문제가 있었는데 그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로그통합과 Prometheus + Grafana를 통한 모니터링 등 관측성(Observability)을 보완하는 데 초점을 둬서 서비스에 문제가 생길 경우 효율적으로 디버깅을 해나갈 수 있도록 했다.

처음엔 원하던 프런트엔드 쪽 경험이 후일로 미루어지게 되어 조금 아쉬운 감이 있었지만 당시 팀의 로드맵에 있어 가장 중요한 업무를 맡고 성공적으로 진행이 되어 뿌듯했고, 작업에 요구된 방대한 양의 지식을 습득하고 직접 구현하는 과정을 통해 많이 배우고 성장할 수 있었다. 이제는 클라우드 계정하나 던져주면 웬만한 스케일의 시스템이 요구하는 인프라를 전부 혼자서 구축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고 심지어 링크드인에서 적지 않은 수의 Cloud/DevOps Engineer 포지션 인터뷰 요청이 오기 시작했다. 지금으로서는 직업적으로 그쪽만 깊게 팔 생각은 없지만 참 사람 일이란 알 수 없다는 생각을 한다.

구매해서 가장 유용했던 아이템: iRobot사의 로봇 청소기

효율적인 시간관리에 늘 관심이 많은 나는 자동화라는 단어만 들으면 변태처럼 설렌다. 현재 거주중인 집의 생활 공간은 뉴질랜드의 집에 비하면 매우 협소함에도 불구하고 런던의 생활은 훨씬 더 바쁜 이유로, 어떻게 하면 ‘귀찮고 반복적이지만 사람답게 살려면 해야 하는 것들’을 줄이거나 효율적으로 해나갈 수 있을까 를 늘 생각하던 차에 블랙 프라이데이 세일 때 반쯤 충동적으로 로봇 청소기를 사버렸다. 평소 듣던 팟캐스트에서 몇번 언급이 되었던 회사 제품이라 만약 구매한다면 여기 걸로 해야지 라고 생각했었는데, 그 와중에도 처음엔 어차피 내가 직접 하는 것만큼 깨끗하진 않을텐데 하면서 반신반의 했다. 더구나 뉴질랜드에서 집을 비우면서 짐을 정리하는게 생각보다 힘들었어서 정말 필요하지 않은 물건은 구매하지 않는 것을 원칙삼아 생활하고 있었기도 하고.

iRobot사의 Roomba 671

사용해 보니 기대치에 비해 훨씬 깨끗하게 청소가 잘 돼서 내 손으로 청소기를 돌릴 필요성을 거의 못 느낄 정도다. 내가 사는 방이 3층짜리 주택의 꼭대기 층인데 1~2주마다 아래층에서 청소기를 분해한 뒤 좁은 계단을 통해 가지고 올라와서 조립하고 사용이 끝나면 다시 분해해서 돌려놓는 등 난리치지 않아도 돼서 너무 좋다. 무엇보다 직접 청소기 돌리는 시간을 줄여준다는 건 다른 생산적인 일을 할 시간이 늘어난다는 것! 만나는 사람마다 적극추천중이다.

가장 뜻밖에 경험: 청취하던 팟캐스트에 출연하다

인연이 깊은 팟캐스트 - 런던 외노걸즈 평소에 팟캐스트를 즐겨 듣는다. 그다지 집중하지 않아도 되는 가사일을 할 때, 운동할 때 그리고 출퇴근길 같이 무의미하게 흘려보내기 쉬운 시간에도 흥미있는 주제에 관한 새로운 정보를 얻을 수 있다는 점을 좋아해서 나의 귀엔 거의 항상 이어폰이 꽂혀 있다. 주로 소프트웨어 공학, 인문학, 그리고 문학 관련 위주로 듣는데, 2017년 9월, 영국 워홀비자가 승인이 나자마자 우연히 런던 외노걸즈’ 라는 팟캐스트의 첫 방송 소개글을 소셜미디어에서 접하게 되었다. 당시 나에게 너무 적절한 시기에 적절한 내용이었고 또 평소에 스스로 팟캐스트를 진행해보고 싶다 라는 생각도 했기에, 진행자들로서 첫 방송을 내보내고 나면 어떤 심정일지 어느정도는 짐작할 수 있었다. 먼 곳에서 잘 듣고있다는 뜻을 담아 응원과 감사의 메시지를 보냈다.

런던에 도착한 후에는 청취자 연결 이벤트에 뽑혀 짤막하게 방송에 나오게 됐는데 그걸 계기로 진행자들과 직접 만나 친해지기도 하고 이후엔 나를 인터뷰하는 에피소드 한편을 녹음해서 방송에 내보내는 흔치 않은 경험도 하게 되었다. 평소에 자주 접하던 미디어에서 내 목소리를 들으니 매우 묘한 기분이 들었고 자칫 외로울 수 있는 타지에서 마음이 잘 맞는 친구들을 특별한 계기로 알게 되어 신기하다. 본 팟캐스트 에피소드 중 하나의 제목을 인용하자면, “세상 어느 곳에 가도 함께할 사람들은 반드시 존재한다”는 말이 와닿았다.

2019년에는..

평소 ‘막연한 목표보다는 구체적인 습관화’라는 방식으로 살고 있어서 새해 목표 같은 건 좀처럼 생각하지 않는편인데 글을 쓰다보니 몇개 떠오르는 게 있다.

좀 더 효율적인 공부방식

워낙 배우고 싶은 주제도 많고 욕심도 많아서 동시에 여러가지 공부를 병행하다보니 특정 주제에 관한 집중도는 떨어진다. 현재만 해도 파이썬, 자바스크립트, 리액트, 서버리스 외에 업무에 필요한 다른 기술들까지 동시에 공부하다보니 곧잘 중구난방이 되곤 한다. 차라리 주제를 두가지 정도로 제한해서 일정 기간 그 두가지에만 집중하고 이후에 다른 주제로 초점을 옮기는 방식으로 공부하면 과연 더 효율적일지 실험해보고 싶다.

자료구조와 알고리즘 공부는 숨쉬는 것처럼

상기한 개선점과 상반되는 것 같지만 자료구조와 알고리즘 만큼은 습관적으로 계속 해야겠다고 느낀다. 11월 초에 마침 계기가 있어서 이쪽으로 급 불타올랐는데 연말이 되어 바빠지니 아니나 다를까 이것부터 놓게 된다. 자료구조와 알고리즘 공부는 운동으로 치면 마치 코어 운동과 같아서 가장 중요한 것중 하나임에도 불구하고 가시적인 효과가 바로바로 나타나지 않으니 소흘해지기 쉽다. 일주일에 해커랭크 문제 최소 몇문제 풀기 하는 식으로 습관을 잡을 것.

운동은 좀 더 다양하게

운동은 자주 가지만 워낙 게으르다 보니 무산소 운동만 하게 되는데 근육이 뭉치기만 하고 풀 기회는 많이 없으니 몸이 갈수록 뻣뻣해지는 느낌이다. 이참에 요가나 필라테스를 시작해 볼까.

오픈소스 프로젝트 개발 참여

늘 생각만 하다 미루던 블로그 개설을 2018년 말에 드디어 했으니 이번엔 마찬가지로 생각만 하고 미루던 오픈소스 프로젝트 개발에 참여하고 싶다. 배우고 싶은 기술이나 언어를 활용할 수 있는 동시에 프로덕트 자체에 애착이 가는 프로젝트를 찾아야 할 것 같다.

런던의 개발 커뮤니티 참여하기

모처럼 개발 커뮤니티가 활발한 도시에서 살게 됐는데 적응기를 거치느라 원하는 만큼 커뮤니티 활동을 하지 못한 점이 아쉽다. 2019년엔 현지의 밋업과 컨퍼런스 등에 좀 더 정기적으로 얼굴을 비추고 최소 두개 이상의 해커쏜에 참여하고 싶다.

정리

아무도 안 시켰는데 자발적으로 조성한 환경적 변화에 적응하느라 유난히 마음이 바쁜 한 해였다. 대체적으로 잘 해낸 거 같지만 여느때와 마찬가지로 이런 부분을 좀 더 잘 했으면 하는 아쉬움도 당연히 있다.

늘 그렇듯 추구하는 삶은 일할 때 열일하고 놀 때 잘 노는 것.

2019년 회고를 쓸 쯤이면 나는 또 어떤 사람이 되어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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